어린이가 가진 상상력의 힘
어쩌면 '어른이 된다'는 것은 '상상력을 잃는다'는 말과 유사어가 아닌가, 싶다. 대통령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우주비행사가 되기도 했던 맹랑했던 어린 시절 꿈을 생각하면. 어릴 적 누구나 가졌었던 무한한 상상력의 힘은 언제부터 사그라드는 것인지 아쉽기만 하다. 요즘 아이들은 내게는 낯선 캐릭터들을 좋아해 슈퍼마리 오, 아이언맨, 진격의 거인도 되고 싶어 한다.
누구라도 될 수 있고,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. 그곳은 아이들의 꿈의 세계이자, 도피처다. 언제 나 주인공이고 싶은 아이들에게 영향력이 한계에 부딪 힐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로부터 훌쩍 떠날 수 있는 자기들만의 은신처가 필요한 건 당연한 게 아닐까.
나도 어렸을 때 소공녀, 소공자 이야기를 읽고 내 친엄마가 따로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때가 있었다. 엄마께 호되게 야단을 맞은 날, 마음의 땅속으로 굴을 파고 들 어가던때 더 그랬다. 아이들의 상상의 세계는 부정하고 싶은 현실의 크기에 비례해 커지는 것인지도 모른다.
그 세계를 잃어버린 어른이 된 지금은 그림책을 통하지 않으면 그 세계와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. 그림 책 속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들여다보며 어릴 적 나를 떠올리는 시간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.
어른의 시간과 어린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. 어릴 적 시간은 굼벵이처럼 느리기만 했던 것 같았는데, 어른이 되면 시간은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흘러간다. 어느 책에서 봤던가. 어린아이들은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용량이 커서 매 순간의 작은 일들 하 나하나를 모두 기억하지만, 나이가 들수록 이것이 작아지면서 꼭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한다고. 그렇게 어른이 되면 몇 가지 기억들만 연결하며 시간을 흘 려보내서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거라고.
그림책 맥스의 상상의 세계인 괴물 나라와 현실의 방 사이의 시간의 간극은 1년이었다. 어린이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엄청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지 알 수 있 다. 근신의 벌을 받은 작은 방에서조차 거대한 다른 세상을 만나고 굉장한 모험까지 할 수 있는 게 어린이의 상상력이다.
그림자의 세계에서 그림자들과 친구가 되고 물아일체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. 이야기 하나 없이도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점점 섞여 마침내 현실인지, 상상인지 구분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과정은 상상력 빈약한 어른의 눈에도 대단히 흥미진진하다.
아이에게 물리적으로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해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 때, 이 이야기들을 떠올리면 좋겠다. 그리고 상기하기를 바란다. 아이들 에겐 물리적인 공간을 가뿐히 뛰어넘는 '상상력'이라 는 거대한 힘이 있다는 걸. 아이언맨이 되어 우주를 누비는 꿈을 꾸는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너무 좁다.
아이들에게 필요한 건, 완벽하게 짜인 넓고 멋진 공간 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숨구멍 이며, 서로의 몸이 닿았을 때 전해지는 사랑의 온기다. 고명재 시인도 <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>에서 말하 지 않았나. 사랑과 사랑이 포개지면 그게 보온이라고. 좋은 부모, 좋은 사랑은 그런 걸 해낸다고. 캄캄한 환 경을 넘어설 무릎과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.
출처:브런치 스토리 정혜영